순식간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찰나였다. 답답하게 가슴 안쪽에서부터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가신건 저만치에 있던 검은 돔 형태의 결계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일대뿐 아니라 거의 시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재해는 너무나도 쉽게 허물어졌다.
높은 건물 난간 위에 걸터 앉아 결계를 내려다보던 재희는 기쁜 듯 펄쩍 뛰었다. 물론 뒤따르는 고통에 하마터면 난간 아래로 떨어질 뻔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의 뒷 목덜미를 붙잡은 것은 스캡-서태오-이었다.
"거 봐, 내가 뭐랬어."
기껏 붙잡아줬더니 여전히 뚫린 입으로 조잘거리는 분홍머리를 그냥 확 놔버릴까, 그는 고민했다.
"오천원★"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한번 균형을 되찾은 몸은 가뿐하게 뒤로 물러났다. 스캡은 버릇처럼 미간을 구겼다. 자신들이 막아섰던 일리걸과 UGN칠드런들이 결계로 진입했을 때, 과연 N시의 지부장이 어떻게 나올지 내기 아닌 내기를 했었다. 물론 순전히 재희에게 말려들어 '반대'를 말한 것에 가까웠지만. 내기의 내용과는 별개로 실제로 이렇게 될 줄은 몰랐기에, 그부분이 조금 더 짜증스러웠다.
지부장이나 되는 사람이 손쉬운 장난도 아니고, 최소 수일에 걸쳐 준비했던 것을 고작 정예도 아닌 이들을 위해 포기하다니.
태오로서는 썩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주머니에서 구겨진 오천원짜리 지폐를 꺼내 일부러 내던지다시피 했다. 그래도 캔디는 촐싹거리며 그것을 잡았다.
"너무 비효율적이야."
"하지만 '인간미'가 넘치지."
재희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구겨진 지폐를 살살 펴서 곱게 반으로 접었다. 결계가 무너진 자리에서는 아직도 불길한 레니게이드 파장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리 모노크롬이라도 저런 걸 갑자기 접는건 부담이 클 터였다. 당사자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텐데. 그런데도 그는 망설임 없이 결계를 거뒀다. 듣던대로 '재밌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있지, 태오야."
서태오는 살짝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재수없는 분홍머리가 저렇게 즐겁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저를 부를때는 대부분 안좋은 일들이 뒤따랐다.
"....왜, 뭐."
"역시 학교 가보고 싶어!"
태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맙소사.
그 짧은 한마디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일련의 절차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위장 신분 준비, 생활기록 조작, 담당 교사 매수, 혹시 모를 UGN쪽과의 마찰까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라면 몰라도 슬슬 성인을 코앞에 둔 입장에선 농담으로도 들리지 않았다.
"뭐때문에."
"그냥?"
당연하게도 대번 살벌해지는 태오의 시선에 재희는 급하게 덧붙였다.
"아까 걔가 입은 교복 보니까! '삼촌'말씀이 생각나잖아! 어? 우리도 학교 한번 다녀봐야지."
"우리?"
태오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그런 시시한 장난에 어울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가려면 너 혼자 가."
"어째서!"
태오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급식이 맛있을 거다, 체육대회도 있고, 학교 축제는 생각보다 더 재밌다더라. 뒤에서는 재희가 신난 목소리로 혼자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대꾸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도 없는 말들 뿐이었다.
"아~ 같이가면 진짜진짜진짜 재밌을텐데."
괜히 말꼬리라도 잡혔다가는 정말로 자신까지 오버드임을 숨기고 학교로 가야할지도 몰랐다. 생각만해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마치 고대하던 소풍 계획이라도 세우는 아이처럼 종알거리는 분홍머리는 이미 아까 마주친 칠드런과 같은 교복을 입은 것처럼 굴었다.
서태오는 제발, 이라는 감정이 불쑥 솟았다.
어차피 뭔가에 꽂힌 놈을 되돌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말릴수록 오히려 더 즐거워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니 바라건대. 차라리 저 놈 혼자 가기를 태오는 진심으로 빌며 계단을 서둘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직 1교시 종도 치기 전.
교실 안은 아침 특유의 느슨한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군가는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고, 누군가는 급하게 숙제를 베껴 적고 있는가 하면, 삼삼오오 모여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 이야기나, 애니, 드라마, 혹은 동아리 얘기를 나누는 교실. 그 속에서 강산은 혼자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맨 뒷자리 창가.
턱을 괸 채 멍하니 운동장을 바라보던 강산은 문득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을 느리게 눈에 담았다. 피곤한 눈,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며칠동안 제대로 잠을 못잔 사람 같은 낯빛.
그때였다. 교실 앞문이 열리며 교실 안 공기가 잠시 바뀌었다.
"야 쌤 온다!"
"숙제 빨리 치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 담임이 익숙한 표정으로 교실로 들어와 교탁 위에 출석부를 내려두었다.
"자, 빨리 빨리 앉아봐라."
담임은 아이들을 집중시키듯 교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오늘부터 우리반에 전학생이 왔다. 들어와."
일제히 시선이 문가로 쏠렸다. 그리고 그 많은 시선에도 아랑곳않고 발을 들인 소년은 꼭 원래부터 이 반 학생이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웃었다.
밝은 분홍빛 머리칼.
눈에 띄는 외형처럼 걸음에도, 인사하듯 휘휘 젓는 손짓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안녕!"
경쾌한 목소리가 교실 안에 울렸다.
"내 이름은 유재희! 좋아하는건 노는거! 달콤한거! 싫어하는건 재미없는 분위기! 앞으로 시끄러우면 내 탓일테니까 미리 사과할게! 하지만 나랑 놀면 절대 심심하지는 않을걸? 앞으로 잘 지내보자!"
구김살 하나 없는 목소리에 교실 여기저기서 작게 웃음이 터졌다. 담임조차 피식 웃을 정도였다. 재희는 그런 반응이 익숙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천천히 교실을 훑었다. 앞줄. 복도쪽. 저를 보며 웃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가 맨 뒷자리. 강산과 눈이 마주친 순간, 재희는 기다렸다는 듯 한쪽 눈을 찡긋 접어 윙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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