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피로감이 몰려왔다. 어차피 말 몇마디로 쉽게 납득시킬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래도, 만약에, 일말에. 그런 것들에 의외로 연연하는 것이 백차유의 나쁜 버릇 중 하나였을 뿐이다.

 

"강산군, 일단 고개좀 들어줄래. 기왕이면...다시 편하게 앉아주면 더 고마울 것 같고."

 

백차유는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자신의 기준으로 재단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럴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게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이기도 했다. 그의 삶의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굴러갔다. 돈이 되는 것이면 뭐든지 했고, 고개를 숙이는 일도 어렵지 않게 배웠다. 필요하다면 자존심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대가로 내일을 버틸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필요해지기 위해 애쓰는 사고나 삶의 방식 또한 헤아리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감히 이해한다는 말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는게 어렵지 않았다.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알겠다고,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등을 두드려 주고 기대하고 있겠다고 말해준다면 저 아이는 더는 불안해하지 않을 테다. 거기다 실컷 '사용'해준다면 도리어 기뻐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굳이 반대로 실망시킬 필요는 없지 않을까.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 것이야말로 더 잔인한 일이 아닐까? 적어도 강산에겐 그렇게 여겨질 것이 분명했다.

필요해지기 위해 애쓰는 사람에게 끝내 손을 내밀지 않는 것은 차라리 노골적으로 이용하는 것보다 더 비겁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답을 좀처럼 낼 수 없는 것은 백차유가 강산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칠드런들은, 그리고 강 산은 애초에 선택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백차유와도 달랐다. 마음 깊이 바라고 있는 것이 스스로가 아닌 타인에게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그랬다. 강 산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보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먼저 배운 아이였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쓰임받고, 버려지지 않기 위해 움직이는 삶.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 그저 살아남은 결과에 가까웠다. 하지만 백차유는 달랐다. 적어도 스스로 선택해서 망가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백차유는 결코 그 모습을 자신의 과거와 같은 선 위에 올려둘 수 없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이가 원하는 것을 내어주는 것이 힘들었다. 자신만이라도, 미약하게나마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또 재밌게 됐네요. 백지부장님.'

 

이름도 기억나지 않을만큼 기억속에서 애써 밀어냈던 사람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자 백차유는 돌이켜보고 싶지 않은 과거의 일들이 지나칠 정도로 선명해졌었다. 동시에 두통이 일정도로 거북함이 밀려왔다. 상대에겐 그저 재밌는 일이었음을 굳이 본인 입으로 듣고 싶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이런 일을 예상하면서도 강 산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선택한게 백차유 본인이었으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몇 년동안 제가 공을 좀 들였거든요.'

"널 버리겠다는게 아니야. 걸림돌이 된다거나...귀찮은 것도 아니고."

 

그리고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자기합리화를 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떠맡았던 칠드런들을 떠올렸다. 그러면 어느새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강 산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당연히 망가지면 거기까지, 입니다만. 살살 부탁드립니다?'

"휴가, 음...방학같은 거라고 생각하자. 솔직히 나는 윤태경 지부장처럼 잘 해낼 능력이 없거든."

 

그래서 백차유는 꿈쩍도 않는, 아니 허리를 숙이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한쪽 무릎까지 꿇은 강산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아직도 그거 가지고 계시죠?'

"생각보다 금방,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고."

 

백차유는 자신이 막 뱉어낸 말을 곱씹었다. 윤 지부장이 돌아온다. 그것은 지금 흐트러진 것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는 뜻이다. 백차유같은 인간이 끼어들 필요도 없이, 지금처럼 적당히 선을 긋고, 적당히 거리를 두게 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른가.

 

'또 폐품을 주워가게 만드는 것도 부하된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같이 여유를 가지고 좀 기다려볼까, 강산군."

 

백차유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언제 그 답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왠지 그 순간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예감이 들었다. 버려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강산에게 답을 해야만 하는 때가. 정답을 찾을 수 없어도, 백차유가 저를 바라보는 아이에게 결국 어떠한 답을 내주어야만 하는 때가 곧 오리라. 정답을 찾지 못한 채로도, 결국에는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때가 오면 무슨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믿음직한 어른이 아니라서 미안하군."

 

고작 쓴웃음을 짓는 것이 지금의 백차유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달리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주며 달래기엔 스스로가 너무 불완전했고, 그렇다고 냉정하게 선을 긋기엔...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애매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DX3 > Log' 카테고리의 다른 글

특별 협력 계약서  (0) 2026.05.30
UGN 그리고 타이터스 side.유재희  (0) 2026.05.30
0. 눈이 멎은 뒤 (@세르기우스)  (0) 2026.05.20
0. 병문안 (@임 주희)  (0) 2026.05.17
0. 대기명령 (@강 산)  (0) 2026.05.1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