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이미 절반쯤 무너진 마을 위로 새하얀 눈발이 소리도 없이 포근하게 내려앉는다. 너무 많은 것이 사라졌는데도 세상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사람의 목소리도, 울음소리도, 무너지는 소리조차 없었다. 그리고 모노크롬은 눈 앞의 침묵이 낯설지 않았다. 이런 현장은 그에겐 처음이 아니었다. 비단 경험의 유무를 떠나서도 그랬다. 백차유는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았다.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죽음으로부터 얻은 힘은 백차유를 또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정확히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이게 만들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했다. 백차유는 담담하게 무전을 통해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레니게이드 현상 확인. 좌표 고정 시작합니다."
모노크롬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눈 앞의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무너진 성당을 중심으로 새하얀 눈발 사이사이에 검은 균열 같은 것들이 어른거렸다. 꼭 공간 자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겨지고 있는 것처럼. 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을 광경이었다. 이전의 백차유도 마찬가지였다. 죽음 이후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한 세계였다.
모노크롬은 잠시간 숨도 멈추고 하나의 틈에 집중했다.
쿵.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바닥을 짓누르는 듯한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끝없이 쏟아질 것만 같던 눈발이 한순간 멈췄다. 틈이 벌어진다. 갈라진 공간 위로 희미한 검은 선들이 촘촘하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억지로 비틀려 당겨지던 경계가 이내 고정된 형태를 갖췄다.
좌표 고정.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인 틈새에 억지로 기준점을 박아넣는 행위였다.
"고정 완료. 진입 개시."
강제로 열어젖힌 공간으로 발을 내딛는다. 백차유는 다시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흔들리던 시야가 닫힌다. 그리고 감각을 교란시키는 잡음이 일순간에 덮쳐왔다. 높은 파도가 순식간에 몰아치듯. 이질적인 레니게이드 파장이 침입자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이 외부 이물을 거부하듯 공간 전체가 거칠게 요동쳤다. 그럼에도 자신만의 균형감각을 되찾은 모노크롬은 눈을 떴다. 한쪽 시야가 온통 검게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의 예상보다는 양호한 상태였다. 그래서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내딛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뒤틀린 이곳에 존재했던 타인의 감정과 기억들이 물처럼 흘러들어왔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물러나야 정상이겠지만 백차유는 그런 틈새 안쪽으로 유유히 미끄러졌다. 자신을 오롯이 유지하면서.
그러다 어느새 그의 안으로 무질서하게 밀려들던 감각들이 일제히 정렬되기 시작했다. 눈발이 멈췄다. 검게 지워졌던 시야가 서서히 빛을 찾으며 하나로 이어진다.
곧이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풍경이 그의 앞에 펼쳐졌다.
눈 덮인 골목길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누군가는 장작을 옮기고, 누군가는 삽으로 눈을 치우고 있었다. 멀리 성당 쪽에선 종소리까지 희미하게 울려퍼진다. 너무 평범하고 조용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백차유는 알고 있었다.
이건,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기억이 나질...않습니다."
백차유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세르기우스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이미 예상한 부분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때론 기억하지 않는 것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 끝까지 붙들고 있어봐야 해가 되는 기억들도 있으니까.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지워버려야만 하는 기억이라면, 이대로 영영 열어보지 않는 것도 나쁜 선택이 아니지 않나.
그래서 굳이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위해 묻기로 했다. 아니 묻는다는 거창한 표현을 쓸 것도 없었다.
융합되지 않은 유일한 생존자. 그것이 지금 백차유가 세르기우스에게 부여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었다. 불완전하게 뒤섞인 레니게이드 반응 속에서도, 그는 이상할 정도로 경계 밖에 남겨져 있었다. 누군가가 마지막 순간까지 억지로 밀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실제로 백차유가 그를 확보하는 순간 마을은 삽시간에 생기를 잃었으니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백차유는 자연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성직자 1명 실종'
죽음이라는 선택지를 완벽하게 빗나가는 존재에 대해, 백차유는 실종이라는 이름을 붙여두었다.
"짚이는게 몇개 있긴한데...혹시 그곳을 보셨나요?"
백차유의 반응에 세르기우스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그래도 당장 멱살을 틀어쥐지 않은 것은 그가 신의 종으로 살아온 시간의 역설이기도 했다. 세르기우스의 억누른 숨이 약하게 떨렸다. 평소 그에게선 발견할 수 없었던 노기가 그의 눈에서 넘실거렸다. 그런데도 백차유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였다. 그래도 조금 전까지 들여다보고 있던 화면에서 완전히 시선을 돌려 몸을 일으켜 태연하게 세르기우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렇게 숨기는걸 말하라는 식의 질의응답은 곤란합니다. 하지만 신부님이 그렇게 조급해하시는건 달리 고려해볼 것도 없겠지요. 제가 아는 한에서는 말씀 드리겠습니다."
정확히는 그 중에서도 지금의 당신이 있는 위치에서 들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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