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카르도의 열이 오른 두 눈덩이 위로 몇 번이나 다이무스의 입술이 닿았다.
“좀 더 일찍 말해주지 않아서 미안하다.”
“아저씨, 나 배고파요. 우리 맛있는 거 먹자.”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의 히죽 웃는 얼굴에도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어쩌다 얼굴은 저렇게 됐는지, 아니 가만 보니 흐트러진 교복하며 걷어붙인 팔이나 흙먼지로 엉망인 운동화까지.
“...어쨌든 내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이무스는 하고 있던 통화를 끊으며 곧장 히카르도의 옆으로 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러면 히카르도는 꼭 고양이같이 동그란 눈을 하고서 웃었는데, 터진입술께가 아픈지 살짝 찡그리는 미간에 다이무스는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아야야”
막 새로운 핏방울이 맺힌 입술 주위를 조심스럽게 누르면 앓는 소리를 나왔다. 장난스러워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편한 마음이 가실리는 없었다. 다시 몸을 일으킨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에게 손을 내밀었다. 히카르도는 군말 없이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끄는 대로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제대로 발목에 힘을 싣지 못한 히카르도가 반쯤 일으킨 몸을 휘청였다.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무너지는 것을 모면한 다이무스의 손에는 더욱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휘청이는 순간 살짝 굳어진 얼굴을 한 히카르도는 슬쩍 다이무스의 눈치를 살피듯 시선을 돌렸다. 조금 기울어진 자세로 왼발에 체중을 싣고 선 히카르도를 뒤로하고 다이무스는 주머니를 뒤적여 열쇠를 꺼냈다. 별안간 문이 열리고, 그리 넓지 않은 현관으로 들어설 때까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다이무스는 곧장 가방을 신발장 옆에 내려두고 구급상자를 가지러 방으로 들어갔고, 절룩거리며 뒤꿈치를 맞대어 신발을 벗은 히카르도는 훨씬 더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은 채 여전히 현관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뭐해, 들어오지 않고.”
금세 다시 방을 나선 다이무스는 아직도 현관에서 미적거리고 있는 히카르도에게 들어오라 턱짓했다. 표정은 아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걱정이나 시키려고 찾아온 것은 아니었는데, 무섭게 보이는 다이무스의 얼굴을 보니 괜히 찾아왔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어진 히카르도는 저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쉬고 싶은 건 오히려 내 쪽인 것 같은데.”
이전에도 길게 한숨을 푹푹 내쉬다 다이무스에게 지적을 들은 바 있었던 히카르도는 괜히 뒷목을 쓸어내렸다. 히카르도는 완전히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얌전히 치료를 받았다. 치료라고 해봐야 상처를 깨끗하게 닦아내고, 그 위로 약을 바르는 것이 다였지만 다이무스는 뭇 심각한 표정으로 꼼꼼하게 약을 펴 발랐다. 히카르도는 따끔거리는 통증에 절로 미간을 좁혔다가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풀기를 반복했다. 이렇게까지 무거운 분위기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저 여태 그래 왔던 것처럼 아저씨라면, 다이무스라면 아무 말 없이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옆자리를 허락해주리라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을까. 조금 더 히카르도의 어깨가 아래로 떨어졌다.
“...할 말은?”
“배고파요.”
마지막으로 붉게 멍이 든 뺨의 상처 위로 반창고를 붙인 다이무스가 먼저 입을 열면 기다렸다는 듯 조금 퉁명스런 목소리가 나갔다. 제 목소리에 도리어 깜짝 놀란 것은 히카르도였다. 하지만 잔뜩 날 선 대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이무스는 구급상자를 정리해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힐끔,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히카르도를 바라봤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눈치를 보는 거냐.”
왜라고 물어도, 히카르도는 당연히 당신의 기분이 나빠 보이기 때문이라고 솔직히 대꾸할 수 없었다. 거기에 지금 다이무스가 궁금해하고 있을 일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말할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다이무스가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되면 멀어질까 봐 두려워졌다.
처음부터 그런 기분으로 히카르도는 다이무스와 친하게 지낸 것이 아니었다. 정말 어른 중에서도 마음이 잘 맞는, 믿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어른이라는 것에 끌렸었다. 답답하고 꽉 막힌 현실에서 눈을 돌릴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가 격려하고 응원해주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두렵기만 하던 미래가 조금은 긍정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것이 문제였다. 어디에도 터놓을 수 없었던 마음을 이전에 한 번 그에게 털어놓은 뒤로는 지나치게 의지했던 탓일지도 몰랐다.
오늘 까미유가 묻는 말에 비로소 제가 어떤 기분으로 다이무스를 대하고 있는지 깨달았기에 더욱 마음은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더러운 호모새끼.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 그 사람을, 다이무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더 싫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깨달은 마음은 혼란스러웠고, 쏟아지는 비난과 폭력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이런 몰골을 하고서 찾아온 것이 그라니.
히카르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길게 한 번 쓸어내리고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목이 더 시큰거리는 게 제대로 삔 것 같았다.
“히카르도?”
“...미안해요. 불쑥 찾아와서...괜히 짜증도 부리고. 돌아갈게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은데 꼴사납게 절뚝거리게 되는 자신이 싫었다. 그런 저의 어깨를 짚는 다이무스의 손길은 더더욱 싫었다. 아니 더럽게 좋았다. 다시 한 번 나지막하게 저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좋아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했다. 아저씨가 내 가족이었으면 하고 바라던 어린아이의 기분을 넘어선 무언가가 분명하게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게 괴로워졌다.
“...이거, 놔, 요...”
고집스럽게 뒤도 돌아보지 않으려는 히카르도를 뒤에서 끌어안은 것은 다이무스였다. 히카르도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리고 괜히 서러움이 밀려왔다. 히카르도는 그런 다이무스를 뿌리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단단히 끌어안겨 맞닿은 등에 전해지는 온기가 상냥하기 짝이 없었다. 숨을 들이켰다. 쿵쿵 터져나갈 듯 뛰는 심장을 그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이런 식으로 그에게 마음이 들키는 것은 싫었다.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잘 할 거라고 믿었던 스스로가 원망스러워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영영 그를 찾아오지 않았을 텐데.
“말하지 않으면 알지 못해. 고민이 있다면 말해다오. 내가 널 도와줄 수 있게.”
마치 토라진 아이를 달래듯 어르는 목소리에 히카르도는 입술을 내리 물었다. 입안에는 약 맛과 함께 다시 갈라진 입술에서 터지는 피의 쇳내가 진동했다. 다이무스는 처음 만났을 때도, 그리고 지금까지 한결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으니 자괴감은 배가 되었다. 그는 그저 집안이 후원하고 있는 고아원에서 알게 된 아이에게 상냥하게 대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멋대로 좋아해 버려도 곤란한 건 그일 것이 분명했다.
까미유의 말들이 옳았다. 괜히 마음을 들켰다가는 경멸당할지도 몰라. 그 생각만으로도 손끝이 저릿저릿해졌다. 히카르도는 어떻게든 다이무스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히카르도는 점점 더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됐다. 그때 목 뒷덜미에 닿는 입술과 뜨거운 숨결에 히카르도는 의미 없는 저항을 멈추었다.
“무...무, 무슨 짓이에요.”
당황이 한껏 뒤섞인 목소리가 양처럼 떨려왔다. 그때 다이무스의 손이 히카르도의 뺨을 조심스럽게 문지르듯 쓸어냈다. 그제야 히카르도는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얌전해진 히카르도를 품에서 놓아준 다이무스는 옆으로 빙글 돌아 히카르도의 앞에 섰다.
“정말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셈이야?”
“......”
눈물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스로 닦을 생각도 않고 히카르도는 그렇게 가만히 서서 울고만 있었다. 자신이 말할 기분이 들때까지, 언제라도 기다려 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몇 번이고 제 상처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눈물을 훔쳐주는 다이무스를 머릿속에 덧그리듯 바라보면서.
“......해요.”
“응?”
그러다 홀린 듯, 꽉 잠긴 목소리를 내면 울음에 먹힌 목소리가 희미하게 흩어졌다.
“좋아해요, 아저씨.”
히카르도는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다이무스는 말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저의 눈물을 훔쳐주던 손길도 더는 제게 닿지 않았다. 그래도 그것으로 되었다고 히카르도는 생각했다. 아주 약간,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굳이 고쳐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그리 눈치가 나쁘지 않은 사람이므로. 그저 어차피 이대로 끝이 날거라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의 아쉬움이 더 정확한 표현일터였다.
“...미안해요.”
히카르도는 울음이 토해질 것 같은 기분을 애써 눌러 담으며 이번에는 사과했다. 이기적인 기분으로 멋대로 고백했으니 당연히 사과하는 것도 옳았다. 히카르도는 숙인 고개를 들지 않고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애써 웃음 지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워낙 좋은 사람이니 받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숙였던 허리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맞닿은 것은 두 사람의 입술이었다. 히카르도는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곧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고여있던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렀다. 감은 눈 아래로 눈물은 계속해서 차올랐다.
그치지 않는 울음과 숨 막힐 듯 퍼부어지는 입맞춤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겨우 다이무스의 입술이 히카르도에게서 떨어졌다. 히카르도는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느슨하게 뜨이는 두 눈은 토끼 눈이나 다름없이 붉었다.
“나도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히카르도. 그러니 사과하지 말거라.”
히카르도의 열이 오른 두 눈덩이 위로 몇 번이나 다이무스의 입술이 닿았다.
“좀 더 일찍 말해주지 않아서 미안하다.”
“...아저씨.”
“네게 부담이 되긴 싫었거든. 네가 도망칠까 봐 불안하기도 했고.”
다이무스는 또박또박, 천천히 히카르도에게 분명히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더 이상 마음을 감춰봐야 히카르도를 아프게 할 뿐이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괴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할퀴듯 자괴감에 빠진 히카르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더는 히카르도를 위태롭게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어렴풋이 히카르도가 왜 이렇게 다쳐왔는지도 감이 오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더욱 그랬다.
“....사랑한다.”
다시 한 번 그 짧은 인사가 떨어지면 히카르도를 그대로 다이무스에게 안기듯 꼭 끌어안았다. 있는 힘을 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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