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한 숨을 내쉰 웨슬리는 마침 바로 들어서는 익숙한 인영에 시선만을 느긋하게 돌려 쫓았다. 그러면 곧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저와 눈이 마주친 상대에게 조금 전의 긴 한숨은 뒤로 감춘 채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갑자기 이런 곳에서 보자고 하다니..별일이군."


곧 자신의 맞은 편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꿰고 앉은 그의 입가엔 작은 생채기가 있었다. 어제 저녁에 헤어질 때까지도 없었던 그 상처는 손으로 찍어 누르면 금새 부어 오를 것 같아서, 웨슬리는 한 번 손대어 볼까도 생각했지만 곧 그만 두었다. 시선만으로도 그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아차린 히카르도가 자연스럽게 턱을 괴며 그 상처께를 가렸기 때문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급하게 청할 것이 있어서 말일세"


웨슬리는 손 사이로 가려진 붉은 상처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술을 한 잔 더 추가했다. 적어도 제 몫의 술이라면 메뉴를 물어볼 법도 한데 아무런 말도 없이 주문을 마친 그를 바라보는 히카르도에게, 웨슬리는 오히려 고스란히 채워져 있는 제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 것 치곤 두서가 상당히 길다고 생각하지만."


히카르도는 그것을 아마도 한 잔 사겠다는 의미로 가벼이 생각했다. 그래서 오래 걸리지 않아 다시 웨슬리의 앞에 잔이 놓였을 때, 제 앞에 놓인 잔을 쥐었다. 새하얗게 투명한 그것의 향은 굉장히 진했다. 부드럽게 웃는 그와 잔을 맞추고, 한 잔을 비운 뒤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급하게 청할 것이 있다고 했지만, 시급을 다투는 일이라면 이렇게 술잔을 권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그는 뭇 사람 좋은 모습을 하고, 유하게 웃으며 둥근 사람처럼 웃고 있었지만 실상은 오히려 다시 없을 완벽주의자에 가까우며, 치밀한 계산과 계획하에 움직이는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히카르도는 더 이상 생각지 못했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진한 포도 향에 그저 약간 어지러움이 인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이거 꽤...독한 술인데"


입안에 오래도록 남는 달큰한 포도 향에 취해 몇 잔이고 마시는 것은 주의해야 하는 그런 물건이었다. 가뜩이나 빈 속이었던 히카르도는 어쩐지 금새 오른 취기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자색의 눈동자가 설핏 약하게 빛을 잃었다.


"부탁할 것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그게 무엇인지 말해야..."


그런 히카르도를 저 역시 한 잔을 말끔히 비워낸 웨슬리가 조금은 날 선 눈을 해 바라보았다. 그 작은 변화도 민감하게 받아들여 조금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히카르도가 조금 굽은 허리를 폈지만 두 눈은 무겁게 다시 한 번 내려 감겼다.


"제네럴..."


그것 뿐이었지만 히카르도는 다시 한 번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퍽이나 인상을 찡그렸다.


"부디 협조해줬으면 좋겠군."


서늘한 눈매는 그대로 둔 채 그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것을 바라보던 히카르도는 무슨 소리냐고 운을 떼었지만 그것은 온전히 말이 되지 못했다. 몸이 무거웠다. 그제서야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깨닫고 나면 더욱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히카르도는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


히카르도가 그대로 테이블위로 쓰러지자 웨슬리는 쥐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면 그것을 신호로 주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몇몇의 남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고, 다소 왁자지껄하던 바는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옮기게."


웨슬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한 뜻을 전달했다. 남자들은 길게 늘어진 히카르도의 몸을 거칠게 일으켰다. 그리고 그 마른 몸을 짐을 짊어지듯 다부진 한 남자의 어깨에 둘러도 그는 깨질 않았다. 그래도 나은 처사였다. 혹시라도 약효가 듣지 않거나, 미리 눈치라도 채서 도망가려 했다면 이 남자들에 의해서 늘씬하게 곤죽이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웨슬리는 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들었다. 하지만 고민하듯 잠시 손에서 굴린 그는, 입에 한 번 물지도 않은 그것을 히카르도가 비운 잔 안에 던져 넣었다. 이제 골치 아픈 일이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고, 아직은 길게 연기를 내뱉으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고 여긴 탓이었다. 웨슬리가 몸을 일으키자 여전히 꽁꽁 얼어있던 주변이 살얼음이 깨지듯 약간의 수군거림은 곧 웅성임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그의 한마디에 다시 잠잠해졌다. 그가 바를 나서기 전까지. 


"출발하게"


작지도 않은 차의 뒷좌석에 구겨진 히카르도는 그래도 어쩐지 영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고, 혹시라도 중간에 깨더라도 제압할 수 있도록 뒤로 손을 묶은 수갑이 지나치는 가로등 불빛에 반짝거렸다. 웨슬리는 그런 히카르도의 상체를 끌어 제쪽으로 당겨 제 허벅지 위로 그 작은 머리를 올려두면 그 무게가 영 싫지는 않았다. 물론 정작 본인은 지금의 모든 상황이 맘에 들지 않을 테지만, 이것을 웨슬리 또한 바란 것은 아니었다.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도 있기 마련이었다. 


웨슬리는 자신을 만나러 나오기 전에 샤워를 했는지 부드러운 샴푸 향이 번지는 머리칼을 흩어내듯 쓰다듬었다.


"아직은 깨지 말아주게"


작게 목을 울리는 소리에 웨슬리는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잦아든 히카르도의 고른 숨소리에 나른하게 시트에 더욱 몸을 기댄 그는 눈을 감았다. 앞으로의 전쟁에 대비해 조금 쉬어두는 것이 현명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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