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게 정신을 놓고 있다가 자신에게로 부딪힌 남자에 의식보다도 빠르게 조금 머리를 숙인 하현은 그 와중에도 똑바로 사과의 인사를 전했다. 그의 잘못이라곤 횡단보도 앞에 가만히 서서 푸른 신호가 끝나도록 서있었던 것 뿐이지만 일단 자신과 타인의 사이에서 항상 그는 자신이 없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 까지나 타인과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우그러지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착한 사람이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겁쟁이리라. 박하현은 그런 남자였다. 그게 어릴 적부터 모든 주변 상황들로부터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억압을 받은 탓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스스로가 결정하고 이뤄나가야 하는 어른이 된 그가 현재 지독한 겁쟁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은 앞으로도 쉬이 변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트라우마처럼 박혀버린 일련의 사건들의 연쇄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스스로 꺼내 보일 수도 없는 상처였다. 소중한 사람에게 버려진다는 것. 결국 혼자가 된다는 것. 아플 수밖에 없다는 사실. 설령 그것들은 스스로가 조금도 원하지 않았음에도 언제나 자신을 찾아와 괴롭히게 된다는 법칙이 그에겐 존재했다. 그렇다면 아주 놓아버리면 편했을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히 그랬을 테지만 그는 그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에 약하고 타인의 존재에 힘을 얻는, 실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지극히 사회적인 인간이기에. 작은 것에도 감동하고  아주 사소한 것에도 기뻐하고 웃을 수 있는 그는 결국 스스로를 바닥으로 떠 밀어 놓았다.

  그래서 항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아니 잔인했다. 결국 모두가 자신을 떠나갈 수밖에 없다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 수 있도록, 그러면서도 자신을 떠나갈 때에 조금이라도 자신이 짐이 되지 않도록. 모든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보이지 않는 족쇄로 얽어 두었다.  그것은 때론 지나친 친절로 표현되기도 했고, 어리숙하고 상냥하며 상대방에게 호감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쌓아 올린 것들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무너질 모래 성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모래 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몇 번이나 그것에 물을 뿌리고, 몇 번이나 조심스러운 손길로 다독거렸다. 파도가 몰아치기 전까지 만이라도 아름다울 수 있도록. 

  그렇기에 남자는 몇 명의 이성 교제를 제안 받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들과 어울렸고, 결국 헤어졌다. 영혼이 없는 만남은 없었다. 적어도 하현은 이미 의식할 필요도 없이 몸에 벤 그 이미지로 존재했다. 모든 것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다시 혼자가 되곤 했다. 그에게 사랑은 참 생소하고도 어려운 것 중 하나였다.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의무만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얼마 전까지 상당히 친해진 남자에게 끌려 그 시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넘쳐 흘렀다. 그래서 그 상대에게서 고백을 받았을 때, 하현의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 아마 그는 모를 터였다. 아니 어쩌면 영영 모를지도 몰랐다. 하지만 결국 그것도 괜찮은 일이었다. 

  어차피 다시 혼자 남게 될 때, 그 심장의 고동을 그 상대방이 기억하고 있다면 그의 노력과는 달리 그를 힘들게 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여길 만큼 그는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었고, 또 그러면서도 기뻤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는 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가슴 안쪽부터 손끝까지 저릿할 정도로 강한 일렁거림이기도 했다. 비록 그것이 사랑이 아닌 축복이라는 것이 문제지만.


“만 이천 칠백원 입니다.”


  몇 번이나 신호등이 바뀐 뒤에야 겨우 건널목을 건넌 하현은 편의점에서 이것 저것 먹을 것들을 골라 담았다. 평소에 군것질은 잘하지 않는 그였지만 자신이 먹기 위해 산 것이 아니기에 답지 않게 꽤 시간을 들인 물건들이었다.


“....”


  편의점을 나서면 하늘이 조금 더 우중충하게 가라앉았다. 비라도 올 모양이었다. 일기예보에는 없었던 말인데. 하지만 오더라도 아마 잠깐만 오고 말 비구름인지라 하현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거두어 조금 더 걸음에 속도를 실었다. 또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진영을 떠올린 탓이었다. 자신을 썩 달가워하지 않을 지도 모르는데 젖어서는 더 대책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집 앞에 서서는 한 참을 망설이는 것이 또 그다웠다. 지금은 방해 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 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주일 전 만해도 그러다 또 쓰러진다고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해가며 아무렇지 않게 그의 집에 들어가, 커피를 타고, 약간의 간식을 준비해 그에게 건넬 수도 있었다.

  사실은 널 좋아하고 있다는 그런 소릴 듣기 전에는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뒤로 모든 것이 더욱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이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겠지만 세상에 몇 없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그는 진영을 허무하게 잃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마음을 낱낱이 들켜버릴까 봐, 혹여나 이런 마음이 언짢지는 않을런지. 그래서 감히 역시 사랑하고 있노라 말할 수도 없는.

  진심으로 사랑을 노래할 수도 없는 겁쟁이는 한참을 더 망설인 후에야 열쇠를 꺼내 들었다. 생각해보면 진영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현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미 아무도 들여놓지 않던 그의 구역에서 멋대로 그의 규칙들을 깨부수며 본격적으로 흔들기 시작했던 건 사실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박하현이었지 않던가. 비겁한 사람. 하현은 스스로를 그렇게도 생각했다. 이렇게 확실하게 구분을 지으려고 보니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저 혼자 있는 게 싫어서, 그를 흔들어 제 옆에 오게 만든 것은 아닐까. 멋대로 그를 끌어안아 자신 만을 보게 만든 웃는 가면을 뒤집어쓴 속이 시커먼 악마는 아닐까.

  하현의 입에서 실없는 웃음소리가 바람처럼 빠졌다. 너무 의식했던 나머지 이젠 어디까지가 본심이고 어디까지가 꾸며낸 가짜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어졌다. 결국 이마저도 지나가면 다시 혼자가 될 텐데. 언제나 그랬듯이 혼자 아프게 될 텐데. 언제나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결국 자신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현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제 손에 들린 봉지를 내려다보았다. 

  차라리 좀 더 제대로 된 사람이었다면, 혹은 그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면. 조금, 아주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런 의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고 어둡게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결국 자신은 사랑 받을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기에, 오히려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상대에게 미안한 기분까지 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공황 상태에 이르기도 했다. 

  왜 나를 사랑하는 걸까. 

  정말로, 사랑하는 걸까.

  나는, 그를 사랑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결국 곧 그의 뺨을 두드리는 한줄기 빗방울에 정신을 차린 하현은 그대로 진영의 집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그의 얼굴엔 조금 전의 수렁 같던 고민의 기운은 한치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처럼, 웃는 얼굴이 그의 얼굴을 대신했다. 아니, 아이러니하게도 그 외에는 생각에도 들어있지 않았다. 채널을 바꿔버리면 새로운 것으로 덮칠듯한 텔레비전과 같이. 하현의 안에는 정형화된 몇 가지의 모습들이 있었다. 모든 사고까지 단숨에 바꿔버릴 정도로 강하게 자리 잡은 그것들은 박하현 그 자체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하현이기도 했지만 결국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상처 만을 가진 어린 하현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그리고 괴롭히게 될 걸림돌들이기도 했다. 결국 그 자체로 박하현이라는 현재의 그가 존재했지만 그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아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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